8. 쨍한 하늘 아래 - 루아
우렁차면서도 찢어지는 듯한 특이한 함성소리. 행진가가 떠오르는 금관악기 특유의 경쾌하고 웅장한 소리가 그 뒤를 이었다. 15초가량의 짧은 선율이었지만 알람으로 사용되기엔 충분한 멜로디였다.
함성소리가 들렸을 땐 마치 악몽을 꾼 사람처럼 미간을 떨며 이빨을 갈았지만, 이어지는 리듬이 들려오자 파들거리던 미간과 눈썹이 곧게 세워지면서 유리코는 눈을 크게 떴다.
소리의 근원을 제거하기 위해 빠르게 오른쪽 팔을 뻗어 조그마한 서랍 위를 더듬는 유리코. 고양이... 가 아니라 조그마한 고양이 무드등의 머리를 몇 번 때리더니 바로 옆의 스마트폰을 찾아 재빨리 알람을 껐다.
잠시 멍하니 뜸을 들이다 천천히 몸을 세우고 시원하게 하품. 눈을 몇 번 비비적거리곤 오른손의 스마트폰을 시선 앞으로 가져온 뒤 화면의 정 중앙에서 살짝 위에 써져 있는 '10:31'이라는 숫자를 비몽사몽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표정을 변화시킨 건 시간 바로 아래에 작게 적혀있는 '9/14' 화요일'이라는 문자였다. 눈을 반 즈음 찌푸리면서 화면을 보고 있던 그녀는 날짜를 보자마자 순식간에 화사한 미소를 띄었고, 방금 전까지 베고 있던 베개를 양 손으로 꼬옥 쥔 채 품으로 당겨 끌어안았다. 따뜻하고 폭신폭신한 감촉과 적당한 무게감이 느껴지는 솜 덩어리에 머리를 푹 박은 채 유리코는 이불 안의 발을 동동 굴렀다.
그 상태로 가만히 몇 분이나 지났을까. 유리코는 끌어안고 있던 베개를 머리맡에 내려놓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대충 정리하고 가볍게 세수를 한 뒤, 다시 침대에 걸터앉아 스마트폰 화면을 켜자 잠금화면의 작은 말풍선 모양 아이콘이 눈에 들어왔다. 설렘 가득한 표정으로 잠금을 해제한 뒤 아이콘을 터치하자 익숙한 파란색 배경화면이 나타났다. 배경의 양 옆에는 길고 짧은 흰색과 초록색의 말풍선들이 세로로 나열되어 있었고, 가장 아래쪽의 절단선 아래로 오늘 날짜와 함께 아직 읽지 않은 메세지가 와 있었다.
[유리코, 잠은 잘 잤어?]
유리코는 헤실거리는 미소를 띄며 빠르게 답장했다.
[응, 푹 잤어! 시즈카 쨩은?]
유리코는 답장을 보낸 뒤 정수기로 향해 세로가 더 긴 유리컵에 냉수를 2/3정도 받았다. 유리컵에서 느껴지는 특유의 시원함에 기분이 좋아진 유리코는 냉수를 반 정도 마신 뒤, 그대로 컵을 들고 방으로 다시 들어갔다.
흐트러져 있는 이불을 반듯하게 펴 덮어놓고 그 위에 가볍게 걸터앉은 유리코. 스마트폰을 들어 시간만 살짝 확인한 뒤 씻을 준비를 하려던 찰나, 침대 위에 내려놓았던 스마트폰에서 띠롱- 하는 발랄한 알림음이 들려왔다.
[스케쥴이 없어서 그런가, 나도 오랜만에 푹 잤어.]
메세지를 확인하자마자 이어서 전송된 메세지.
[점심부터 먹을 거지? 몇 시 쯤에 만날까?]
톡톡, 자판을 누르는 소리와 함께 둘만의 대화가 이어졌다.
[1시 쯤이 괜찮을 것 같은데!]
[시즈카 쨩은 먹고 싶은 거, 따로 있어?]
[나? 나는...]
[글쎄, 우동이라던가.]
'역시나...' 라는 가벼운 탄식과 함께 멋쩍은 웃음을 지은 유리코. 답장을 하려던 순간 시즈카의 말이 이어졌다.
[유리코랑 가보고 싶은 곳이 있어서.]
[에! 어딘데?]
[그건 만나서 얘기하기로 하고.]
[그럼 1시에 이케부쿠로역, 괜찮지?]
[아, 응!]
[출발할 때 메세지 줄게!]
[알았어.]
-
초콜릿 색깔의 단추가 달린 하늘색 원피스와 그 위에 걸쳐진 병아리색 카디건. 원피스의 흰 옷깃이 카디건을 살짝 덮어 더욱 풍성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주변에서 이따금 시선이 느껴졌지만, 이젠 익숙해진 듯 유유히 지하철에서 내린 유리코는 카디건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현재 시간을 확인했다.
표기된 시간은 12시 43분. 20분 정도 일찍 도착했지만, 왠지 시즈카라면 이미 도착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유리코는 승강장을 나서며 메시지를 보냈다.
[도착했는데, 시즈카 쨩은 어디야?]
아니나 다를까 바로 확인되었다고 표시되는 메세지.
[빠르네. 나도 아까 도착했어.]
[동쪽 출구 앞에 서 있으니까 천천히 와.]
[응, 금방 갈게!]
평일인데도 불구하고 많은 인파가 몰려있는 역. 사람들 사이에 끼어 겨우겨우 승강장을 빠져나온 뒤, 인파에 묻혀 잘 보이지도 않는 입간판과 표지판을 읽어가며 나아갔다.
사람들과 부딪히고 가벼운 사과를 반복하던 빈도가 적어지기 시작하자 햇빛 특유의 화사한 빛이 눈에 들어왔다. 같은 빛이지만 역사 내부의 네온 간판들과 다른 느낌을 주는, 따스하고 온화한 광채.
고작 몇 분이었지만 답답하고 꽉 막힌 듯한 폐쇄감이 단 한 번에 해소되는 느낌이었다. 너무 감성에 젖어있던 탓일까, 구름 한 점 없이 쨍한 푸른색을 띄고 있는 창공을 멍하니 바라보며 걸어가다 급하게 달려가는 사람에게 부딪혀 한두 발짝 옆으로 밀려났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유리코는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역전 상가부터 대로 너머 고층 빌딩까지 번화가의 풍경을 눈에 새기며 나아가다, 호를 그리던 시선의 끝에서 백화점 건물 벽에 비스듬히 기대어 서 있는 익숙한 실루엣을 보곤 앗, 하는 소리와 함께 그 실루엣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머리 색깔과 거의 비슷한 남색의 H라인 치마. 중간중간 흰색 세로 줄무늬가 들어가 있었고, 깔끔한 흰색 블라우스를 치마로 살짝 덮어 벨트로 고정시킨 깔끔한 스타일. 블라우스 위로 내려와 있는 특유의 옆머리 덕분에 흰 의상을 심심하지 않게 채워주는 느낌이었다. 익숙한 옷차림과 머리 스타일 덕분에 인파가 북적거렸음에도 알아보기 쉬웠는지, 유리코는 시즈카를 보자마자 팔을 흔들며 빠른 걸음으로 다가갔다.
"안녕, 유리코"
"안녕, 시즈카 쨩!"
"아, 우선... 생일 축하해!"
"응, 유리코도 시간 내줘서 고마워."
"생일이잖아~ 게다가 요즘엔 이렇게 만나서 놀 시간도 없었는데, 오늘 아니면 언제 놀겠어!"
"그렇긴 하지. 이런 번화가에 놀 목적으로 온 것도 되게 오랜만이네."
"나도 최근엔 서점 때문에 들르기만 하던 정도였으니까... 오늘 엄청 기대돼!"
"...유리코가 나보다 더 들떠있는 것 같은데?"
시즈카가 가볍게 웃는다. 자기도 모르게 들떠있던 유리코도 표정을 고쳐 배시시하게 마주 웃었다.
그런 유리코를 쳐다보며 가볍게 미소짓더니, 시즈카는 치마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무언가를 검색하듯 자판을 입력하고 화면을 넘기는 행동을 반복했다.
번화가 가운데에 가만히 서서 스마트폰만 만지작거리고 있는 시즈카가 어색해 보였던 것일까, 유리코는 시즈카의 어깨에 딱 붙어 특유의 청량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뭐 찾아?"
"오늘 가기로 했던 곳. '카루카야'라고 하는 가게야. 분명 역 바로 근처에 있다고 들었는데."
"어라, 시즈카 쨩도 안 가봤어?"
"응. 나도 처음 가보는 거야. 그래서 말했잖아? '가보고 싶은 곳'이라고."
"아...~ 그런 의미였구나. 그럼 나도 같이 찾아볼게!"
유리코는 어깨에서 살짝 떨어졌다. 하지만 둘의 사이에 틈은 두지 않은 채, 시즈카 옆에 나란히 서 스마트폰을 꺼냈다. 빠르게 지도 앱을 실행시킨 뒤 검색창에 '카루카야'를 입력하자 화면 안의 지도가 확대되면서 뾰족한 침이 달린 원 형태의 빨간 표시가 여러 군데 생겼다. 표시와 함께 화면 왼쪽에 여러 가게들의 정보가 나타났고, 유리코는 가장 위의 가게 정보를 터치했다. 그러자 '세이부 이케부쿠로 백화점'을 가리키고 있던 침을 중심으로 지도가 한번 더 확대되었다.
"시즈카 쨩, 여기 아니야? 세이부 이케부쿠로 백화점."
"아, 응. 맞아. 그 백화점 건물 옥상에 있는 가게일거야."
"근데... 세이부 백화점이라면..."
세이부 이케부쿠로 백화점은 둘이 등을 지고 서 있었던 건물의 명칭이었다.
둘은 동시에 고개를 돌리며 시선을 위로 올렸다.
"등잔 밑이 어두웠네..."
"그러게. 그래도 헤매는 일은 없어서 다행이야."
-
백화점의 옥상은 매우 개방적이었다. 건물을 둘러싸고 있는 사각형 모양의 난간은 녹색의 식물들로 감싸져 있었고 중간중간엔 붉은색을 띄는 식물들도 몇몇 섞여 있는 모습이었다. 난간 외에도 옥상 위엔 듬성듬성 식물들이 많이 자라 있었으며, 조그마한 사이즈의 연못도 위치해 있었다. 옥상이라기보다는 정원의 느낌을 더 잘 살린 이 공간의 한 쪽 모서리엔 쿨 톤의 색깔들로 이루어진 테이블과 의자가 배치되어 있었는데, 의자에 앉아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식사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와아, 이런 분위기의 백화점 옥상이라니..."
"작은 정원 같은 느낌이네. 옥상이라 바람도 잘 통하고."
"그러게~ 이런 곳에 있는 가게라니, 마치 소설에만 나올 것 같아!"
신기한 표정으로 옥상 이곳저곳을 둘러보는 유리코와, 가게를 찾으려 두리번거리는 시즈카.
시즈카는 난간 쪽을 훑어보다 살짝 안으로 들어가 있는 곳을 발견했다. 그 앞에는 형형색색의 의자와 테이블이 있었고, 사람들이 먹는 음식을 보아 시즈카는 저 곳이 찾고 있던 가게임을 확신했다.
"유리코, 저기야!"
어느새 연못으로 다가가 꽃 앞에 웅크리고 앉아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있던 유리코의 팔을 낚아 챈 뒤, 가게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시즈카는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반쯤 끌려가듯 걷다 고개를 들어 시즈카의 얼굴을 본 유리코. 오늘 보여준 표정 중 가장 진심이 담겨있는 표정이었다. 환한 미소와 자신만만한 눈매를 띄며 들뜬 듯 가게를 가리키고 있는 시즈카를 본 유리코는, 그녀의 기분에 답하듯 똑같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발걸음을 맞춰주었다.
가게의 명칭까지 선명하게 보일 정도로 가까이 가자 시즈카의 발걸음이 천천히 돌아왔다. 어느새 둘은 손을 맞잡은 채 옆에서 나란히 걷고 있었고, 발걸음마저 똑같이 맞추어져 있었다. 그 사실을 눈치챈 유리코의 얼굴은 사과처럼 붉게 달아올라 있었으며, 비어있는 반대쪽 손은 연인과 처음 손을 잡기 전의 소녀처럼 긴장한 듯 원피스의 아래 깃을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의식하면 의식할수록 유리코의 시간은 천천히 흘러가기 시작했다.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갈 때마다 자신의 발소리와 시즈카의 발소리가 겹쳐 뚜벅거리는 소리가 귓가에 맴돌았고, 얼굴에서 흐르는 땀 한 방울 한 방울의 촉촉한 감촉이 그대로 피부에 전해져왔다. 가게에 가까워질 때마다 시즈카의 들뜬 마음이 점점 더 고조되기 시작했는지 자신도 모르게 잡고 있던 손에 힘을 더욱 주기 시작했다. 서로의 손바닥이 더욱 가깝게 밀착될수록 유리코의 심장 박동은 점점 빨라지기 시작했고, 어느새 발걸음보다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유리코는 난생 처음으로 느껴보는 진실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천천히 고개를 돌려 시즈카를 쳐다보았지만, 시즈카는 이미 유리코에게 시선을 맞춘 채 들뜬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시, 시즈..."
"유리코, 어서 주문하자! 뭐 먹을래? 모르는 메뉴 있으면 말해. 내가 설명해줄게!"
평소보다 톤이 확 높아져 있는 흥분한 상태의 목소리였다. 그런 시즈카의 목소리를 듣자 붉어져 있던 유리코의 얼굴은 다시 평소의 뽀얀 피부색으로 돌아왔고, 요동치던 심장 박동도 평상시의 속도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고조되었던 몸과 마음이 한 순간에 진정되어 생긴 반동이었을까, 유리코는 갑자기 자신의 가슴에 손을 올리더니 기운이 빠진 듯한 멍한 표정으로 시즈카를 보며 눈동자만 몇 번 깜빡거렸다.
"...유리코? 괜찮아?"
시즈카의 부름이 한 번 더 이어졌다.
"아... 응! 괜찮아! 주문하러 갈까? 으음, 나는...-"
유리코는 그제서야 완전히 진정이 되었는지 잡고 있던 손을 놓고 화사한 미소를 지으면서 나긋나긋한 톤으로 시즈카의 부름에 답했다. 그 후 시즈카보다 먼저 메뉴판으로 눈을 돌린 유리코.
메뉴판 앞에서 신중하게 고민하는 유리코에게 시즈카가 어깨를 기대었다. 몇 분 전, 백화점 앞에서 가게를 찾던 자신에게 어깨를 기대었던 유리코처럼.
유리코는 순간 당황한 기색을 보이며 시즈카를 향해 시선을 돌렸지만, 그녀의 눈동자에 비친 것은 자신을 마주보고 있는 쨍한 푸른 색의 눈동자였다. 유리코의 눈동자가 살짝 살랑이자 시즈카는 옅은 웃음을 지어주었고, 유리코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부드러이 시즈카의 손에 깍지를 끼며 웃음을 마주 지어주었다.
시즈유리하면 루아, 루아하면 시즈유리죠. 루하~ 안녕하세요, 프로듀서 여러분. 루아입니다.
틈만 나면 시즈유리 주접을 떨지만 정작 여러분들께 제대로 된 작품을 보여드린 적은 없었기에, "이번 기회를 통해 시즈유리의 맛을 제대로 맛 보여드리자!"라는 생각으로 투고하게 되었습니다.
원래 구상해 놓았던 내용은 투고본 분량의 2~3배 정도 되지만... 6천 자가 생각보다 짧아서 어쩔 수 없이 1부, 2부, 3부 형식으로 나누어 쓰게 되었네요.
이번에 투고한 작품은 '1부'에 해당하는 내용입니다. 서로에게 묘한 감정을 느끼게 되는 둘의 이야기인데요, 프롤로그라고 볼 수도, 본편이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주제가 '행복'이니 만큼 역시 [등장인물 모두가 행복한 이야기]를 쓰고 싶었습니다. 물론 행복 말고 다른 감정도 공존하는 이야기가 되어버렸지만요.
장문으로 쓴 첫 작품인 만큼 퀄리티가 떨어지는 부분이 많이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혹시 지적할 부분이나 궁금한 부분이 있으시다면 트위터 DM으로 찾아와 주신다면 매우 감사하겠습니다! 피드백은 중요하니까요.
이번 작품으로 인해 시즈유리가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으면, 또 좋아해주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사실 상품 같은 것도 눈 밖이었어요. 저는 단지 제가 좋아하는 커플링을 많은 프로듀서 분들과 함께 공유하고 싶었을 뿐이니까요.
앞으로 시즈카와 유리코에게 많은 관심과 사랑 부탁드리며, 제 담당 아이돌인 모모코도 많이 귀여워 해주세요!
긴 글 읽어주신 모든 프로듀서 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올리며, 저는 이만 밀리 스테미너 빼러 가보겠습니다~ 루바!
루아 (@tenmochon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