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막글경연대회

2. ELLIE와 에리의 행복은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 밤색(ChestnuT)

김샤메 2021. 8. 1. 16:50

1.

인간은 사회적 동물[social animal, 社會的 動物]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대로, 인간은 타인과 만나 집단을 형성하고 교류하며 그 속에서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음으로써 행복을 얻는다.

 

미즈타니 에리 또한 인간이지만, ‘사회적 동물이 되기엔 결점이 많았고 그 결과 도태되었다.

 

어째서 미즈타니 양은 그렇게 작은 목소리로만 말하는 거야?”

 

……

 

혼자서 영상 편집을 해내고, 작곡이나 디자인도 가능할 정도로 머리와 재능은 날 때부터 비상했지만 부족하던 사회성과 대인기피증이 발목을 잡아 인간관계에서 실패해버린 에리.

 

이게, 가장 큰 목소리인데?”

 

전혀 안 들리니까 묻는 거잖아. 그리고 왜 매번 말끝을 흐리는 거야? 우물쭈물하지 말고 확실하게 말해.”

 

하지만 나는

 

내버려 둬, 매번 영상 편집이나 애니 같이 관심도 없고 뭔지도 모르겠는 말만 하잖아. 저녀석.”

혼자 있을 때면 몰라도 조별 활동 때도 말을 전혀 안 하니깐 진전이 안 되고, 매번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도 모르겠어.”

 

……

 

처음으로 사회화를 경험하는 장소인 학교. 역설적으로 그녀는 사람 사이에 부대껴서 억지로 하기 싫은 일을 하고, 남들 앞에 나서서 자기 의견을 큰 목소리로 밝혀야 하는 것의 괴로움만을 배우고 도망치듯 내뱉은 등교 거부를 계기로 은둔 생활의 절차를 순식간에 밟게 된다.

 

이리하여 반에서 겉도는 아싸에서 등교거부생이라는 타이틀까지 얻게 된 에리. 당연하지만 학교를 나가지 않아도 시간은 흐르기 마련이니 무한정으로 남아도는 시간을 때우기 위해 한동안 취미인 영상 편집에만 몰입했지만 얼마 못 가 금세 지루해졌고, 무언가 재밌는 것을 찾기 위해 인터넷 속을 돌아다닌다.

 

그러던 도중 발견한 것이 모 동영상 사이트.

마침 자신 같은 서브컬처 영상 제작자들을 위한 소규모 대회까지 한창 진행 중이었다.

 

공모 기간은 6월 첫째 주부터 마지막 주까지, 영상 타이틀과 태그에 대회명을 표시해 참가 의사만 나타내도 참가상을 드립니다, ?’

 

때마침 제작 중이던 영상도 있었지, 솔깃한 기회에 본명을 살짝만 비튼- 'ELLIE'라는 닉네임으로 그곳에 가입한 것을 계기로 미즈타니 에리, 아니, ‘ELLIE’에게는 큰 변화가 일어났다.

 

 

 

2.

[춤춰보았다】 【3회 영상 콘테스트연애 서큘레이션 ELLIE

재생수: 164,137 / 마이리스트 수: 1,876 / 코멘트 수: 7,651 / 랭킹 최고 순위: 3]

 

대성공이야!”

 

결과는 엄청난 호평. 히키 생활 이래로 한 마디조차도 입 밖에 내지 않던 ELLIE가 화면을 보자마자 자리를 박차고 환호할 정도였다.

 

올린 지 고작 사흘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관심은 순식간에 모여들었고, 코멘트란은 다들 가입하지 얼마 안 된 데다’ ‘아직 15살에 불과한데도’ ‘이 정도 퀄리티를 내는신예, ELLIE를 향해 각기 다른 방식으로 경악과 감탄을 표현하고 있었다.

 

영상을 만든 ELLIE 본인조차도 예상치 못한 화려한 데뷔, 사이트 프로필에 같이 등재해둔 블로그 ‘Fountain Of ELLIE’에도 덩달아 접속자가 급증할 정도였고 대회가 끝난 후에도 열기는 쉽사리 가라앉지 않아 벌써 고정 팬층이 두껍게 쌓인 지 오래였다.

 

드디어 인정받았어, 내가 좋아하는 일만으로도! “그동안 발휘하지 못했던 자신의 능력을 모두가 칭송해주는뿌듯함과 "남들과 얼굴을 맞대고 대화를 나누며 함께 일하는 것 따위의 싫은일을 하지 않아도 이렇게 지낼 수 있다"라는 행복감. ELLIE는 넷 아이돌로서의 네트워크 활동에 푹 빠져들기 시작한다.

 

자신이 만들어낸 자아에 아주 천천히 잡아 먹혀가면서,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도 모르는 채로. 그것이 자신의 행복이라 여기며.

 

 

 

3.

나의 이름은── ELLIE

사는 곳은── 액정 속

 

그러니까, 아무와도 대화하지 않아

그러니까, 아무와도 만나지 않아

 

남과 만나거나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서툴러

누군가와 글로 대화하는 일은 있지만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건── 한 명 정도뿐

 

그 이후로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

 

ELLIE의 인기는 시들 줄 몰랐고 내놓는 작품마다 족족 고평가를 받으며 어느새 사이네리아라는 친한 인터넷 친구가 생겼을 뿐만 아니라 넷 아이돌의 퀸같은 거창한 호칭까지 생겼을 정도였다.

 

넷 아이돌의 퀸은 참 좋구나, 블로그에 별 내용도 없고 시답잖은 짧은 글만을 써도 댓글창에서는 너도나도 공감하며 이야기를 건네주고, ELLIE 씨의 다음 작품을 기대한다는 응원과 장문의 칭찬으로 의욕을 불어넣어 준다.

 

학교에서 선생님이나 애들이랑 대화하는 건 그렇게나 싫어했는데, 오타쿠들이랑 목소리 없이 글로만 대화하는 건 괜찮았던 걸까. 지금도 사이네리아 이외의 사람한테는 보이스챗 요청도 죄다 거부했었고.’

 

──하지만 한편으로는,

 

에리, 에리? 엄마 왔어.”

지금 밤 12시인데 아직도 안 자고 있는 거니?”

 

……

 

그렇구나.”

 

있지, 어제부터 갑자기 날이 더워져서 아빠가 출근할 때 네 걱정을 하시던데. 방안은 많이 안 덥니? 내일도 폭염 주의보니깐 조심하렴.”

 

생각보다 더 길어지는 등교 거부와 낮에도 밤에도 방에 틀어박혀 얼굴을 볼 수 없는 딸을 걱정한 부모님이 방문을 두드려도 무언으로 응수하고.

 

폭염주위보 같은 게 떠봤자, 밖에 안 나간 지 2달은 넘었으니까 상관없는데.’

그것보다 지금이 여름이었나?’

 

바깥 풍경이 어떻게 생겼는지, 오늘 날씨가 어땠는지 같은 기본적인 정보조차 망각한 채, ELLIE는 그저 모니터 너머의 세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자신의 행복만을 추구하고 있었다.

 

그런 건 됐고, 하던 편집이나 마저 해야겠네.’

이 구간은 잘라내고, 인트로 부분은 페이드 아웃으로 시작하는 게 좋을지도.’

 

며칠 전부터 사이네리아가 채팅을 도배하면서까지 만들어달라던 리퀘스트 영상은 길이가 긴 만큼 손이 많이 가다 보니 자정부터 시작해서 쉬지 않았는데도 갈수록 수정 거리가 늘어나기만 하였다.

눈부신 화면을 쳐다보다 뻑뻑해진 두 눈을 문지르다가 문득 화면 한구석에 시선이 간다.

 

뭘 했다고 벌써, 5인 걸까?’

 

오전 530. 언제나처럼 촬영해뒀던 영상 편집에 한창 심혈을 기울이다 말고 귀를 기울이니 이른 아침부터 출근 준비를 하러 아파트 복도를 걸어가는 옆집 사람의 구두 소리, 창문을 넘어 환하게 방을 비추는 아침 햇살. 다른 사람들과 달리 ELLIE에게 있어서 이런 신호는 슬슬 잘 때가 되었다는 신호와도 같았다.

 

슬슬 자야겠네기나긴 하품을 하고 PC를 끈 후, 침대에 들어가 잘 준비를 한다.

 

오늘도 편집 삼매경이었네, 빨리 편집하고 싶었는데도, 무리였어?’

 

일어나면 마저 이어서 편집하고, 다 끝나면 사이트에 올리는 김에 새로 나온 영상들도 정독해보다가 오늘처럼 새벽쯤에 자면 되려나.’

 

, 이런 생각을 해도 결국엔 매일 똑같은 하루가 반복되니까달라질 것도 없고?‘

 

 

 

눈을 감고 잠을 청하려다 문득 떠오른 것.

 

이대로도 괜찮은 걸까?‘

 

잘 생각해보면 모니터 속의 'ELLIE'에게는 대단한 능력자, 존잘, 넷 아이돌의 퀸과 같은 엄청난 수식어가 있어도 현실의 '미즈타니 에리'에게는 그저 아무것도 없다. 그야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인터넷 속의 유저로서 행복만을 좇다 보면 자연스레 현실의 자신은 그 반동으로 피폐해지기 마련이니깐.

 

생각해보면 지금 내가 이렇게 방에서 인터넷만 할 수 있는 건 부모님이 지원해준 덕이잖아. 게다가 나는고등학교 졸업도 하지 못한 중학생 신분이고, 장점이라곤 영상 제작뿐이고 사회성조차도 없는데

 

누군가의 부양과 남은 시간이 사라지면 지속조차도 불가능한 불완전한 행복, 그것은 언젠간 끝이 올 거라고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지만── 그 사실마저도 애써 무시하고 있었던 것.

 

지금 당장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데에는 괜찮겠지만 나중에 다가올 미래에는 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일시적인 행복의 끝에 다가온불행한 미래에 대한 공포심, 잊고 있던 불안감이 덮쳐온다.

 

"괜찮지가 않잖아, 전혀

 

갑작스러운 불안감에 달아난 졸음과 함께 침대에서 일어난 ELLIE, 모두가 잠에서 깨어나 하루를 시작하는 와중에 ’ELLIE‘가 아닌 에리로서의 자신의 미래에 대해 오랜만에 고민하기 시작했다.

 

좋아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질 수는 있지만, ’언제까지나 영원히계속 행복할 수는 있을까?

 

 

 

4.

그렇게 생각하던 시기가 저에게도 있었습니다.”

 

? 갑자기 무슨 소리니?”

 

, 아니요, 혼잣말이었어요. 담당 프로듀서 오자키와의 통화 도중, 문득 딴생각에 빠진 나머지 이상한 말을 내뱉어버리고 급하게 수습한다.

 

이번 댄스 트레이닝이 고강도 레슨이라고 유명하던데 애가 지쳐서 헛소리를 하나, 아무튼, 이번 오디션은 제대로 준비하고 있지?”

 

의상도 입어보고, 레슨까지 받고 와서덕분에 녹초예요? 오는 길에 비도 갑자기 쏟아졌고.”

 

오늘도 고된 레슨 끝에 겨우 몸을 일으켜 집에 도착한 에리, 자신이 사이트에 올려둔 영상을 보고 관심을 가져 연락해온 프리랜서 프로듀서 오자키 레이코와 만나 현실 아이돌 미즈타니 에리로 데뷔한 지도 어언 3달이 지났다.

 

아무도 몰랐겠지, [영상 제작에 올인하던 히키코모리인 내가 이곳에서는 어엿한 현실 아이돌?!] 같은 일이 일어날 줄은. 그런 시시한 농담을 떠올리면서 프로듀서와 서로 내일 보자는 간단한 인사를 건네고 통화를 끊던 도중, 어머니가 청소해뒀는지 오늘 아침때보다 더욱 깨끗해진 책상 위 컴퓨터가 눈에 들어왔다.

 

옛날에는 엄마가 불러도 방문도 잘 안 열고 온종일 컴퓨터 앞에만 앉아 있었는데, 이제는 아이돌 일 때문에 바빠서 조금이라도 앉아 인터넷 할 시간조차도 없고 계속 잠수 상태.’

 

생각난 김에 자리에 앉아 본체의 전원 버튼을 누른 후, 익숙한 그 커뮤니티로 향해서, 로그인. 스카우트를 받은 이후로 만든 영상이 없다 보니 그대로 멈춰 있는 영상 기록을 스크롤 하며 정독하다가 내친김에 블로그에도 가본다.

 

[이때까지의 고민]

 

, 이 글은

제목에 커서를 올려 클릭하기도 전에 저 게시글을 작성할 당시의 기억이 되살아난다.

 

[언제나처럼 영상 편집을 하고 자려고 누웠는데. 문득 , 이대로도 괜찮은 걸까?’라는 생각이 들어서 잘 수가 없었어.]

 

[하지만 지금 깨달아봤자 밖에 나가는 것도 무섭고, 다시 학교에 가기는 더 싫어]

 

[우울하니까 오늘은 웃긴 영상이라도 찾아볼까.]

 

기껏 반성하고서 하는 일이 또 인터넷 질이라니의지박약?’

 

정독함과 동시에 떠오르는, 불안정한 행복을 붙잡고 자기 위안만 하던 그 시절. 슬며시 밀려오는 부끄러움에 황급히 비공개 처리를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안도하는 웃음을 띠고 있었다.

 

──옛날의 ELLIE가 추구하던 행복도 많이 나쁜 건 아니야, 그것 덕분에 지금의 나, ‘미즈타니 에리가 있는걸. 나만의 방식으로 수많은 사람의 눈길을 사로잡고, 서로가 행복한 시간을 보내게 만들고 싶다고 바라는 마음은 ‘ELLIE’에리도 같으니까.

하지만 주위를 돌아보지 않고 아무런 계획 없이, 오직 혼자서 사라질 행복에 매달리는 건무모한 일?

 

지금처럼 모두와 찾는, 지속 가능한 행복이좀 더 마음에 드는걸.”

 

‘ELLIE’는 자판 위에 손을 올리더니, [아이돌 데뷔, 해버렸어]라는 제목과 함께 미즈타니 에리로서의 글을 작성하기 시작한다,

 

 

미즈타니 에리와 ELLIE의 행복은 다르다. …로 시작하는 소설을 멋들어지게 쓰고 싶었지만, 글을 지지리도 못 쓰다 보니 머릿속에만 계속 담고 있던 이야기를 이번 대회를 계기로 한 번 풀어봤습니다.
 
사실 이걸 쓰기 전에 다른 글을 대략 3천 자 정도 써놨는데(주제는 똑같이 ‘미즈타니 에리’와 ‘ELLIE’), 이건 소설이라기보다는 아무래도 고찰 글에 더 가까운 듯해서 따로 쓴 게 이 글이었습니다.
 
아쉽게도 디어리 스타즈 본편 내에서도 ‘에리는 어째서 히키코모리가 되었는가’, ‘히키코모리면 당연히 학교도 안 나갈 텐데 왜 사복은 교복으로 고정된 건가?’, ‘어쩌다 인터넷에 자아 의탁을 하게 되었는가?’ 등등에 대한 대답은 나오지 않아서 이번 글에서는 ‘행복’이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창작하면서도 작중에서 나오지 않은 부분을 상상력으로 채웠습니다. 공식이 안 알려줬으면 내가 멋대로 날조하면 되잖아!
 
마지막으로 2번 단락의 갑자기 나온 '연애 서큘레이션'은 성우네타(cv. 하나자와 카나), 3번 단락 도입부에 나오는 대사는 디어리 에리 루트 시작 부분의 독백이었습니다, 이걸 안 말하면 아는 분이 없을 거 같아서 여기서라도…
 
이것저것 말하다 보니 길어진 사담은 언제나 그랬듯이 디어리 리메이크를 기대하며 마칩니다. 에리 센빠이 귀여워요!!


밤색(ChestnuT) (@SAIko_denyansu)